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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처녀 제 오시네, 김 교수의 커튼콜을 위해>avec 2018 2018. 11. 5. 21:21
< 봄처녀 제 오시네, 김 교수의 커튼콜을 위해>
그가 어느 날 [노자]의 저 유명한 첫 단락 ‘도가도비상도...’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을 때
당황했지만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느낌을 가졌다. 물론 지금도 그의 노자 해석이
옛날 왕필주석은 물론이고 세간에 이름 석 자 떠들썩했던 김용옥, 이경숙, 최진석 씨 등과 어떻게 다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지방대학 출신의 지방사립대학 교수로서, 또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학파로서 – 아마 이 세 가지 족쇄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지 아는 사람만 알 터이다 - 오로지 좌고우면하지 않은 공부를 통해 [한국철학회] 학회지에 노자 관련 논문을 3회 상재했다는 것은 안다.
이제야 말하지만 항상 그에게 묻고 싶었던 삐딱한 질문 ; ‘왜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어요?’에 대한 답은 아마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그가 몇 년 전부터 필생의 작업으로 6권의 책으로 묶어 동서양철학을 큰 틀에서 분석하고 용융시키고자 하던 시도는 결국
불치의 큰 병에 걸려 재고해야 했고, 점점 쇠하는 육체를 스스로 안타까워하며 3권으로 줄이는 작업의 초고를 끝냈으나, 금년 추석이 지난 후 운명의 여신은 아예 그와의 대화도 불가능하게 했다.
언젠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와 전화를 했다. 문득 프랑스 철학자인 데리다의 어떤 개념이 궁금해서 물었다가 그가 장장 50분간 이렇게 저렇게, 힘찬 목소리로 나 같은 자에게 쉽게 설명을 해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정말 징글징글한 그의 열정이 듣는 나에겐 힘겹기도 했다. 이제야 그런 기억도 가슴을 저리게 만든다.
그에게 공부란 무엇이었을까. 몇 년 전 부당 해고 이후 비리에 연루된 학교재단과 지루한 소송이 시작됐을 때, 그는 본격적으로 공부와 집필을 했다. 본인 말씀으로는 오히려 그를 계기로 하루 19시간을 공부에 매진했다고 했다. 때론 가슴 떨리는 흥분으로 때론 육체가 힘에 부쳤지만 새로운 사상가로서 자신을 어떤 극단으로 몰아붙였을까? 마침내 근육이 점점 녹아들고 오장육보도 굳어버린다는 그 병에 걸린 후 그는 “하늘이 내게 다 주지는 않는 갑네” 라고 한 것이 착잡했다. 또한 그 낭랑했던 목소리가 늘어난 카세트테이프처럼 힘없이 재생되는 것이 나에겐 더 비감에 젖게 했다.
정말이지 그는 그런 목소리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15년 전 어느 봄날, 김영주 선생과 우리는 담양 소쇄원 인근 언덕배기 벚꽃 아래로 소풍을 갔다. 그가 산사춘 한 병과 게맛살을 검은 비닐 봉투에서 꺼내서 일행에게 돌린 후 한잔 따라 마시더니 갑자기 일어나서 예의 그 환한 표정으로 감격에 겨운 듯 '봄처녀'를 부르기 시작했다. 탁 트인 목청에 예상치 못한 놀라운 솜씨였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지상의 찬연한 봄날을 황홀해하던 마흔 중반의 김영주. 만개한 왕벚나무 벚꽃을 배경이었다.
복숭앗빛 뺨이 눈부셨다. 그를 그저 흐뭇하게 올려다봤던 그 날, 나는 그 장면이 무슨 비극의 복선 같다는 생각을 철없이 했는데 이런 글을 쓰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내가 다이몬의 후예라도 된 것 같아 몸서리쳐진다.
외롭고 고독하지만 마땅히 걸어야할 길을 걷고 있는 ‘지방’의 모든 김영주에게 건투를 빈다, 그리고 바란다. 감히 기적처럼 선생의 쾌유를, 그리고 앙코르 ‘봄처녀’를 위해 다시 선생의 커튼콜을.
---- 이런 글이 무슨 소용일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