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인사동은 그야말로 국적불명의 도떼기 시장 같았다. 한국인에게 전통은 무엇일까. 학창시절 두어번 들렀던 ‘귀천’이라는 찻집은 작은 체구의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천시인은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지. 고은, 황지우, 이성복, 장정일을 읽던 담시에게 그의 시는 시시하고 졸리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의 몇몇 시들은 비로소 눈물겨웠다. 찻집 ‘귀천’은 물론 없었다. 제주로 옮겼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그 시절 종로에서 와이엠시에이 건물 옆으로 난 길을 지나 인사동으로 걸어가곤 했는데, 역시 종종 들렀던 백반집 ‘이문식당’도 보이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대문을 통과해서 소반에 식사를 하면 고달픈 서울생활에 지친 폐에 산소를 충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이답지 않지만 내 꼬라지가 원래 그런 걸 어찌하겠누. 그런 감상들은 나를 쉬 지치게 한다.
황급히 인사동을 빠져나와서 종로3가 쪽 피맛골을 가다가 ‘고등어구이 이면수어구이’ 입간판을 단 작은 백반집에 들러 7000원짜리 식사를 했다. 아직 그쪽은 서울의 시간성 역사성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긴 하더라. 비쩍 마른 여주인이 낯이 익어보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집을 들렀던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배가 고파 비린 고등어구이를 게걸스럽게 먹는데 등뒤에서 단골손님이 오는지 “아이고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도 안와서 궁금했어~”하는 아짐들의 핀잔이 들려왔다. 하도 호들갑을 떨어서 호기심에 살짝 돌아보니 꽃미남 30대 초반 청년이다. 이모들에게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예쁜 총각. 얼굴은 이쁘고 볼일이란 말이지.
내 생애에 그런 관심을 받는 일은 그야말로 가뭄에 콩나듯 있는 일인데, 여의도 대교인가 장미아파트인가 부근 상가2층 맥주집의 사장님(60대초반)은 나(마흔살)를 처음 본 날부터 ‘인상이 좋다’고 노골적으로 잘해주셨다. 장삿속만은 아닌게 여러 사람과 함께 와도 마찬가지였고, 친구들이 왜 담시만 편애한결 같이 대해주셨다. 한 2년만에 다시 들렀을 때는 왜 이렇게 안왔었냐며 섭섭해하셨다. 그날 물었다. 내가 그렇게 맘에 드세요 사장님? 했더니, 그 분이 생각하는 사람좋은 인상의 어떤 원형과 딱 일치하신다는 거다. 세상에 플라톤도 아니고 말이다. 정말 나같은 깡패관상도 그럴 수 있다니,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여자는 왜 그런 편견이 강할까. 무조건적인 환대와 복종.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얼치기 잘난체들과 사기꾼들과 제비들과 무능력자들이 좋은 여자 만나서 복에 겨운 삶을 사는 것이겠지. 생각해보면 스물다섯 시절 내 인생을 몰빵하고 싶었던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를 낙점하고 잘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게도 그녀만이 나의 뮤즈, 나만의 그녀의 구원자인데 말이야..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단 말이지.
인도의 속담에 삶의 방식 세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삶을 여행으로 생각하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 다른 두가지는 기억에 없으니 나또한 삶을 여행으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이겠다.
삶을 여행으로 소풍으로 생각하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는 끔찍한 일이 많다. 알고보니 모씨는 과거 어느 여성을 끔찍하게 괴롭혔다고 한다. 만나주지 않는다고 칼을 들고 그녀를 기다렸다는데 감옥에 갔어야 할 사람이 버젓이 뻔뻔하게 회사를 아직도 다니는데 정말 그새끼는 지금 다른 여성을 괴롭히지 않을까?? 그녀에게 지옥을 선사했던 그녀석은 여전히 잘 놀고다닌다는 후문이니 기가막힐 따름이다. 쓰다보니 화나네. 엊그제 점심 식사에 그 얘길 듣고 가슴 속에 화가 하나 자리잡았다.
소풍같은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소풍같은 삶을 꾸는 소시민적 희망에 무슨 죄목을 붙이겠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