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생각했다
050919
처가에 갔다. 갑자기 잠이 쏟아져 견딜 수가 없이 피곤했다. 장인 장모님 눈치를 무릅쓰고
일찍 혼자 이불속에 들어갔고, 늦게 일어났다.
금요일 저녁,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 만나 소주를 마신 후유증이 틀림없다.
예전같지 않은 이런 몸의 아우성에 대해 더 이상 모른 척하긴 힘들어졌다.
유년기. 개미가 구멍을 드나드는 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관찰하거나,
혹은 거미를, 혹은 방아깨비를 혹은 뱀의 허물을 보면서 어떤 세계로 빠져들었듯이,
요즘엔 아이들과 함께 놀며 아이들의 작은 몸을 만지고, 냄새 맡고, 눈빛을 관찰하는 그것.
그것에 요즘 나의 모든 신경이 집중돼
있다. 와우와 챈챈이 더 어렸을 때는 짐짓
모른 체 한 것인지..아니면, 몰랐던 것인지..잘 몰랐던 것임에 틀림없는
감정들이며
행동이다.
월요일, 휴일 근무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밀린 청소를 하고, 다시 한 번
멸치볶음에 도전했다. 멸치양념으로 쓸, 설탕은 약간 끓여
맨마지막에 섞었음에도
불구하고.. 멸치 볶음은 실패했다. 간장을 너무 많이 넣은 거 같다.
단지 겨우 먹을 수 있을 만큼 되었고, 이번엔 버리지 않고
반찬통에 넣었으니 성공이다!
그런데, 저녁은 오뚜기 스낵라면을 끓여 먹었다. 볶아놓은 멸치엔 손도 대지 않았다.
체중조절에
성공할 때까지, 라면을 먹지 않겠노라하는 작은 목표가 보기좋게 실패했고,
그런 자포자기 상태에서도, 내가 처음 만들어본 멸치볶음은 끝까지
먹지 않은 이성을
발휘함으로써, 내 스스로, 내 정성을 묵사발로 만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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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손질(머리부분과 내장을 떼어내는)을 하면서, 오디오 북 박완서'엄마의 말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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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말뚝.
박완서 원작. EBS 라디오문학관. 정진아 극본.
소설가 박완서가 개성출신 실향민이었구나..
누가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랴..라는 말과 더불어, "신이 도처에 가 있을 수 없으므로, 신은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말이 조금은 우습게 들리게 만드는 경우다.
내 어머니의 말뚝은 무엇이었을까? 자식에 대한 태산같은 기대와 어느정도의 만족, 그리고 실망..그런데, 일제시대!에도 그런 지극한
교육열과 '신여성'으로 딸을 키우기 위한 허영이 있었다는게 놀랍다. 예를 들어, 나는 일제시대의 모든 '타협형 사회지도층'에 혐오를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일제가 얼마나 치밀하게 한반도를 지배했는가에 대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그 시대의 '변절'이 어느 정도 이해되기도 한다.
일제는 조선 어머니들의 교육열을 그냥, 방치!했다!!
->논리비약이 심해..그야말로 일기에나
어울리는 감상이다.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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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CH on 채널 [THE PASSION OF
CHRIST] 감독/멜 깁슨
영화의 마지막 20여분을 보고 감상문을 쓴다는게 우습지만, 영화에 대한 감상은 아니다.
어찌됐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임에 틀림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알아들을 수 없는 히브리어로 '주여,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하는
중얼거리는 장면을...또는, 그 중에 약간은 죄의식이 있는 로마병사..아니 유대병사?가
예수의 부활을
예감이라도 하듯 머뭇거리며, 차마 심하게 대하지 못하는, 조금 우스꽝스런 장면들을, 거기에다, 지나치게 끔찍한 상처를 만들어 놓은 예수의 몸이,
오히려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걸 느끼면서 보았다..
예수의 삶은 이렇게, 2000년 흘러, 호주의 어느 스타배우 겸 감독에게 영상으로
제작되고, 수없이 카피되고, 한국의
케이블채널에서도 보게 되었다.
이를 예수는 예견했을까.
이 영화가 대책없는 기독교 근본주의를 담고 있다는 혹평이 있긴 했지만,
별개로, 사실 예수의 삶에 대해 나는 거의 아는 바가 없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 노력은 허사이리라는 예감이 앞섰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휴 때, 아내 - 천주교 신자이나, 남편의 비협조로 인해 지금은 '죄인'이 되버린 -와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둘 모두 논쟁을 할 정도로 예수에 대해 일천한 지식의 소유자들인지라, 논쟁은 깊어지지 않았고, 약간의 감정 충돌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나는 성경의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고, 다만, 한국 기독교를 비판한 몇 편의 논문과 두어권의 책을 읽은 기억이 있고, 그렇게 뭉뚱그려진, 어설프기 짝이 없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조지 부시라는 희대의 꼴통이 이라크를 침략하면서 '십자군전쟁'에 비유하고, 한국의 무슨 기독교 단체가 전쟁에 찬성하는 성명서를 읽는 꼬라지를 보면서, 현대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의 양념이 그나마 맹숭맹숭한 나의 기독교론을 더더욱 편견에 몰아붙인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에 대한 내 주장은 그런 것이었다. 예수가 못 박힌 육신을 부활시켰든 아니든, 혹은
결혼을 했든 안했든, 혹은
예수가 젊었을 때 불교도였건 아니건,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 또는 말씀!만으로도 성인이고, 그 자체로 완성된다고... 그 이외의 모든
비논리적
배타성은 극복되어야한다고, 거기에서 예수는 출발해야한다고..
허나, 이런 논리는, 흔히 그렇듯 대한민국에서는 미친 놈
취급받거나, 곧바로 안수기도대상자 취급받고, 악마의 키스를 받은 저주받은 자로 치부된다, 아니 그게 과장이라면, 믿지 않은 부류로 싸잡아
빗질당하고 만다.
예수는 서른셋에 죽었다고 전하지만, 나는 서른 셋을, 누군가의 표현대로 문지방넘듯,
혹은 구렁이 담넘어가듯 넘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적당히 회피한다. 예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앞으로도 끊임없는 예술작품으로, 픽션으로, 혹은 처절한 반성문으로 앞으로 천 년이 지나도 이어질 것이다. 태양신 라가 수 천년 동안 숭배되었으나 사라지고 말았지만, 적어도 예수는 그 이상을, 인류의 희망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예수여, 나의 나태를 용서해주소서, 다만, 예수 당신의 이름이 또다른 악행의 핑계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나이다. 아멘.)